칼럼

공룡의 꿈을 향한 NC 다이노스의 발자취와 팬 여러분의 이야기가 함께하는 공간입니다.

NC의 에릭 해커 영입, 마침내 완성된 A.C.E. 트리오
2013-01-21 18406

ACE. 한국어 표기로는 에이스. 세상에 있는 온갖 좋은 뜻은 죄다 들어있는 말이다. 카드에서는 가장 좋은 패를, 테니스에서는 서브 득점을, 골프에서는 홀인원을 뜻한다. 야구에서는 최고의 투수를 가리킬 때 쓴다. 그냥 1선발이나 10승 투수가 아니다. 상대에게 두려움을 줄 만큼 위력적인, 팬과 동료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내보내면 무조건 이긴다는 확신을 주는 투수가 에이스다.

NC 다이노스가 에이스를 얻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세 명이나 된다. NC는 최근 외국인 투수 에릭 해커(Eric Hacker)와 입단 계약을 완료했다. 먼저 입단한 아담 윌크-찰리 쉬렉과 함께 A.C.E. 트리오(Adam, Charlie, Eric)가 완성됐다. 세 선수의 절묘한 이니셜 조합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운명에 가까워 보인다. 프로 1군 무대에서 험난한 첫 해를 보내게 될 NC에서, 이들 세 선수가 문자 그대로 ‘에이스’ 역할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에릭 해커, 한국 타자들의 타격 기술을 ‘해킹’한다




에릭은 1983년 미국 텍사스주 던컨빌에서 태어났다. 이름 때문에 모기업이 IT기업인 NC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다행히 컴퓨터가 아닌 야구와 미식축구에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다. 에릭은 올해 나이 서른살로, 야구선수의 기량과 경험치가 가장 정점에 달하는 시기를 막 통과하는 중이다. 키 185cm에 104kg의 탄탄한 체구, 오른손으로 공을 던지고 타격할 때는 스위치히터가 된다.

에릭은 2002년 드래프트에서 23라운드에 뉴욕 양키스의 지명을 받고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초반은 나쁘지 않았다. 2003년 20살의 나이로 루키리그와 하위 A팀에서 호투를 거듭하며 잘 나갔다. 그러나 불의의 팔꿈치 부상을 입고 토미존 수술을 받는 통에 2004년 한 해를 건너뛰었다. 2005년 다시 싱글 A에서 10경기 5승 2패 평균자책 1.60으로 펄펄 날았지만,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 부상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결국 수술을 받으면서 2006년에도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2009년 피츠버그 유니폼을 입고 뒤늦게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을 때, 이미 에릭의 나이는 26살이 되어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망주라고 할 수도 없는 애매한 처지가 된 셈이다. 이번 한국행이 에릭에겐 기나긴 불운의 사슬을 끊는 동시에, 야구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받은 두 차례의 큰 수술은 에릭에게서 스피드와 스터프를 앗아갔다. '베이스볼 아메리카'의 벤 배들러(Ben Badler)에 의하면 해커의 빠른볼 구속은 시속 88마일에서 92마일(141~148km/h)를 오가며, 이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강속구 투수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대신 에릭은 빼어난 커맨드와 컨트롤을 자랑하는 유형으로 성장했으며, 특히 스트라이크존 좌우 코너 제구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에릭이 투심이나 싱커 계열 구종이 없는데도 플라이볼보다 두 배 가량 많은 땅볼을 유도하는 비결이다. 마이너리그 9년 통산 삼진/볼넷 비율도 2.29로 수준급이다. 스트라이크 비율이 높고, 삼진이나 볼넷보다는 맞혀서 잡는 아웃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이 때문에 2010년 에릭이 미네소타 트윈스로 이적했을 때, 현지 매체에서는 ‘전형적인 미네소타 스타일의 투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에릭은 빠른 볼과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의 ‘기본 4종세트’를 구사한다. 이 중 체인지업은 빠른 볼과 스피드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아 효과적인 구종이라 보긴 어렵다. 대신 에릭은 시속 82~4마일대로 날카로운 변화를 자랑하는 수준급의 슬라이더와 73마일대 낙차 큰 커브를 결정구로 잘 활용한다.


지난해 에릭의 피칭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특징적인 투구패턴이 드러난다. 에릭에게 피칭의 기준점은 우타자 기준 바깥쪽 낮은 코스다. 볼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 바깥쪽 코너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10.3%). 그리고 우타자 기준 몸쪽 바짝 붙이는 빠른 볼을 높은 빈도로 구사해서 타자의 밸런스를 무너뜨린다(전체의 12.1%). 유리한 카운트가 되면, 결정구로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커브 또는 슬라이더로 타자의 방망이를 끌어낸다. 볼과 스트라이크의 차이가 크지 않아서 타자에게는 더 유혹적이다.


에릭은 과감한 몸쪽 승부와 스트라이크 위주의 공격적인 피칭을 통해 볼 스피드의 약점을 보완해 왔다. 여기에 타자가 타이밍 맞추기 아주 까다로운 투구폼도 한 몫을 한다. 와인드업 기준으로 해커의 투구폼을 보면 마치 슬로우모션 비디오를 틀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다른 투수들이 1-2-3 하는 타이밍에 공을 던진다고 치면, 에릭은 1-2-3-4 내지는 1-2-3-4-5가 되어서야 손에서 공이 나오는 식이다. 이는 타자에게 실제보다 구속이 빠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국내 타자들 입장에선 시즌 초반 처음 상대할 때 애를 먹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주자 있는 상황에서 슬라이드 스텝(퀵모션)으로 던질 때는 와인드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구와 구속이 떨어지는 단점도 보인다.

▶ 2012년 해커의 빅리그 선발등판 경기(샌디에이고전) 영상 


A.C.E 트리오가 지닌 의미




NC가 영입한 A.C.E. 트리오에겐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셋 다 폭발적인 강속구보다는 안정된 컨트롤과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능력’을 자랑하며, 이를 통해 많은 이닝을 버텨낼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


이는 신생팀인 NC 입장에선 중요한 플러스 요인이다. 신생팀이 고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투수력, 특히 선발투수 부재다. 불펜투수는 어떻게든 만들어서 쓸 수 있지만, 5~6회를 소화하는 선발투수를 키우는 데는 오랜 시간(또는 돈)이 든다. 투수력이 두텁지 못한 신생팀 입장에선 선발투수가 일찌감치 무너지면 도무지 대책이 없다. 확실한 투수가 없으면 남은 이닝 뒤처리가 마치 시베리아 제설작업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같은 9이닝이라도 투수력이 강한 팀에겐 2시간처럼, 투수력이 약한 팀에겐 4시간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어떻게 보면 NC 입장에선 1군에서 많은 승수를 올리기에 앞서, 일단 페넌트레이스 128경기 1152이닝을 가능한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게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담-찰리-에릭은 모두 적은 투구수로 범타를 유도하며 6이닝 이상을 소화할 수 있는 투수다. 단순히 이닝만 길게 끄는 게 아니라 적은 볼넷과 효율적인 투구로 실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경기 운영 능력도 갖췄다. 선발투수가 일단 6이닝을 막아주면, 그 이후에는 고창성-송신영-이승호 등 불펜투수들을 활용해서 경기 후반을 막아낼 수 있다. 세 투수가 등판하는 날은 경험이 부족한 신인급 투수들의 이닝 부담이 크게 줄어드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김경문 감독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계산이 서는’ 경기가 가능하다. A.C.E. 트리오가 등판하는 날에 총력을 기울이는 ‘선택과 집중’으로 보다 많은 승수를 노려볼 수 있다.


게다가 올해는 9개 구단 체제인 관계로 1~3번 선발투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9번의 휴식일 전후로 1~3선발을 몰아서 기용할 수 있다. 많게는 1~3번 선발투수가 전체 선발등판 횟수의 68%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꿔 말하면, 4-5 선발이 다소 약하더라도 1~3선발이 막강하면 얼마든지 많은 승수를 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외국인 A.C.E. 트리오를 보유한 NC로서는 전혀 불리할 게 없는 조건이다. 세 투수가 하나같이 이니셜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줄 날만이 남았다.